유치원에 분노하다..1970,80년대생 엄마들의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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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北風), 병풍(兵風), 후보 간 단일화, 후보의 말실수 혹은 과거 발언 등이 역대 대선기간 판세에 영향을 준 변수였다. 그러나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양강구도가 깨지는 계기가 되는 과정은 달랐다. 지난 4월 11일 한국유치원총연합회가 주최한 사립유치원 원장 및 유아교육자 모임에서 안 후보가 “대형 단설유치원 설립 자제”를 언급하면서 꺾였다. ‘맘카페’로 불리는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분노의 여론이 들불처럼 번졌다. ‘사회정책’이 후보의 지지율과 판세 변화에 영향을 주게 된 것은 이례적이다. 이례적 변화의 주도자는 자녀를 유치원에 보내거나 보낼 준비를 하는 30대 여성들이다.
19대 대선은 ‘엄마들’의 선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출산, 보육, 교육, 인권 및 일자리 이슈에서 당사자인 ‘여성’을 중심으로 놓을 것을 요구하며, 선거문화의 변화까지 이끌고 있다. 선거를 앞둔 엄마들의 분노와 고민을 육아 커뮤니티와 인터뷰 등을 통해 살펴봤다.
■취업도 육아도 발목 잡는 애증의 유치원
전업주부, 경력단절 여성, 엄마. 경기 고양시에서 5살 된 딸을 키우고 있는 김지영씨(39·가명)에게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2012년 임신과 출산으로 직장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연구소에서 일했다. 비교적 재취업에 유리한 경력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경력단절 여성을 위해서 나라에서 이런 것 저런 것 한다고 하는데 막상 구인공고가 뜬 것을 보면 좋은 일자리는 거의 없어요. 시간이 맞지 않거나 집과 직장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다닐 수 없는 곳도 많구요.” 어렵게 조건에 맞는 곳을 찾아 합격했다. 연봉계약까지 했지만 다닐 수 없었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종일반 전환이 안 됐어요. 종일반에 추가 인원을 더 안 받겠다는데 어떡해요.”
경기 고양시는 인구가 부쩍 늘고 있는 지역이다. 대규모 택지개발이 마무리되면서 1992년 24만명, 2000년 약 80만명 수준이던 인구는 2014년 100만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인구만큼 유치원은 늘지 않고 있다. 오씨가 사는 동네에 유치원은 단 2곳이다. 한 유치원은 월 30만~40만원, 또 다른 유치원은 70만~80만원을 받는다. ‘숲체험’, ‘놀이학습’ 등 정부의 보육료 지원에 해당하지 않는 특별활동비가 제각각이어서다. 유치원 가격 차이가 이렇게나 나는데 어느 한쪽이 가격을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두 군데 중 어느 한 군데라도 일단 가기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학부모들이 줄을 서 있으니까요.” 유치원비 때문에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데 유치원에서 아이를 맡아주지 않으니 직장에 다닐 수도 없다. 민간 위탁 중심의 보육정책과 경력단절 문제는 얽혀 있다.
간신히 유치원에 보냈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니다. 교사 1명이 아이를 20~25명씩 맡기도 한다. 특별활동비와 교사 교체에 대한 불만이 많다. “어느 날 아이 얼굴에 멍이 들어 있고, 어떤 날은 친구가 자기를 싫어한다는데 교사가 이유를 전혀 몰라요. 교사도 봐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으니 정신이 없는 거예요.” 반면 보조금을 노리고 시작해 경영난에 시달리는 유치원도 허다하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원칙적으로 매매가 금지됐지만, 토지와 거물을 모두 매입해 계속 유치원으로 사용하면 매매가 가능하다. 부동산 사이트에는 ‘어린이집 매물’이 허다하다. 경기 수원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ㄱ씨(32)는 “원장이 교육에 열의를 갖는 훌륭한 사립유치원도 많다. 모든 사립유치원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사들의 경력을 꺾고, 처우가 열악하고, 이따금씩 교사의 어린이 폭행사건이 벌어지는 곳도 분명 있다. ‘복불복’이 돼버린다는 게 문제”라고 전했다. ‘유치원 공약’에 분노가 폭발한 이유다.
안 후보의 공약이 사립유치원을 늘리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전국 초등학교에 병설유치원 교실 6000개를 추가 설치해 국·공립유치원 비율은 최대 40%까지 늘리고, 소득 하위 80% 가정에 아동수당을 월 10만원씩 지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교육부로 이원화된 어린이집과 유치원 행정체계도 통합해 ‘유아학교’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부지 및 건물 확보를 위해 인구 감소로 학생 수가 줄어드는 학교 건물과 경영난에 시달리는 어린이집, 유치원 매입도 꾸준히 할 계획이다. 얼핏 보면 유아교육의 공교육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재원 조달방안도 꼼꼼하고 후보의 공약 중 가장 구체적이다. 그러나 엄마들은 사립유치원장 모임에서 한 “(사립유치원 도산을 우려해) 대형 단설유치원 설립 자제”와 “유치원 경영 자율성 보장” 약속을 가장 본질적 문제로 보고 있다.
■ “엄마들에게 또…” 분노
서울 목동에서 아들을 병설유치원에 보내면서 학부모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는 임모씨(36)가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발언을 사립유치원장들 모임에서 했다는 겁니다. 단설유치원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이면 아무래도 행정에서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운영의 자율성이 필요한 곳은 병설유치원들입니다. 단설유치원이 더 많아져야 하구요. 그런데 또 해명과정에서 질 좋은 교육을 원하는 학부모들에게 ‘나라 재정은 생각지도 않고 단설유치원만 바라는 이기적인 엄마들’이란 이미지를 씌웠습니다. 무엇이 우선순위였는지 보여준 것입니다.”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는 것은 30대 엄마들에게 매우 익숙한 감각이다. 10년 넘게 추진된 정부의 ‘저출산대책’은 막상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 입장에서는 철저히 도구로 여겨지는 과정이었다. 아이 그 자체보다 아이가 나라의 중요한 도구로 여겨진다고 생각되는 것을 거부했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구호가 1980년대에 태어난 ‘엄마’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경기 고양시의 정지연씨(36·가명)는 “유승민 후보의 공약을 보니까 하나는 마음에 들고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음에 드는 공약은 초등학생 오후 4시 하교 일원화다. 부모가 직장에서 돌아올 동안 방과 후 학원 등을 보내지 않고 학교에 맡길 수 있다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공약은 무학년제이다. 안 후보의 학제개편 공약도 탐탁지 않아 했다. 소위 ‘4차 산업혁명’을 앞둔 혁신 교육제도에 대한 반발이 크다.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가 높지만 엄마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도드라진다. 갑작스러운 개편이 아이와 엄마에게 주는 혼란 때문이다. 먼 국가 전체의 미래와 당장의 혼란과 어려움 중 후자가 가볍게 여겨지는 것이 답답하다. “아이를 낳아도 이 아이 자체가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게 키워서 국가에 세금 많이 잘 내도록 하라는 메시지 같아서 오히려 불편하죠. 이런 데서 아이를 낳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경기 군포시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이혜민씨(32)는 매일 아침 네 살과 한 살 두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준비로 시작한다. 젖병을 삶아 깨끗하게 말리고 도시락을 챙긴다. 아이가 먹을 감기약을 의사 처방에 따라 한 번에 먹을 수 있게 5회로 나눠 어린이집 교사가 볼 설명서까지 첨부한다. 자는 아이들을 깨워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다.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는 학원에 간다. 밤 10시까지 학원 일을 하고 다시 어린이집에 들러 아이를 찾아온다. 아이들을 워낙 좋아해 여건만 된다면 네 명을 낳고 싶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건 피할 수 없다.
■아이도 나도 도구로 보지 마라
“어린이집에 일찍 보내는 것은 후회 없어요. 말도 빨리 배우고 오히려 적응도 잘하고 좋아해요. 하지만 내가 정신을 조금이라도 놓치면 집안 일도, 아이도, 학원 일도 망한다는 생각에 항상 긴장이 돼 있죠. 둘째 때는 산후조리원도 제대로 못 갔어요. 돈도 돈이고, 복직도 빨리 해야 하고. 그래도 소득을 포기하고 아이와 함께 사는 길을 택했는데, 이 선택에 대해 사회가 별로 존중해주지 않는 거 같아요. 이를테면 학원 경영자 워크숍에 가보면 성공하는 길 등에 대해 강의하는데, ‘아, 저건 다 애가 없어서 가능한 거야’ 싶은 메시지들이 많아요. ‘몰입하라. 일에 열중하라.’ 아이는 낳으라면서 그러지 못하는 모습을 별로 존중해주지 않아요. 그러면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죠.”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발의한 ‘슈퍼우먼 방지법’의 취지에 공감한다. 학원 경영자인 이씨는 이 법도 남편 육아휴직 의무화를 핵심으로 한 것이라, 이 법이 실현되더라도 당장 삶이 나아질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은 잃지 않을 생각이다.
이씨는 “어린이집에 보낼 때마다 ‘엄마 아빠도 공부하다 올게’ 하고 웃으며 헤어져요. 집에 와서는 신나게 놀아주려 하죠. 아이가 엄마를 ‘나 밥 차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 이혜민으로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보니 세상에 더 관심 갖고,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죠”라고 말했다. 정책공약뿐 아니라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후보를 주시할 생각이다. “요즘 30대 엄마들이 어떤 사람들인데요. 다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파이터예요. 일이랑 육아랑 살림이랑 다 하는 게 그만큼 힘들거든요. 그래서 다들 민감해하고, 힘들어하지만, 그만큼 단단하고, 싸우는 거 두려워하지 않아요.”
‘엄마를 위한, 엄마에 의한, 엄마의 정치’를 표방하는 ‘엄마정치’라는 모임도 생겼다. 엄마의 정치세력화를 표방하는 모임이다. 장하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환경운동연합 권력감시팀장)이 제안해 만들어졌다. ‘엄마정치’를 함께 운영하는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대표는 “여성들이 자신의 문제에서 사회적인 실패를 발견하고, 참여에 나서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2008년 촛불집회를 시작해 축적된 참여의 경험이 누적돼 있다”며 “사회가 제대로 주목하고 가치평가하지 않았을 뿐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박정희 시대 이후 여성에 대한 정책은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졌다. ‘엄마’로 호명돼 산아제한 시절 시키는대로 아이를 낳지 않고, 고도성장기 현모양처 역할을 하고, IMF 이후에는 자기계발과 소비를 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성운동의 조류는 여성을 엄마라는 정체성과 분리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성으로 경험하는 임신, 출산, 양육과 관련한 정책은 공백이 있었다”며 “저출산 정책의 실패로 분노하고 고통받던 여성들에게서 그 공백을 여성 스스로 메워보자는 목소리가 나타났고, 그 동안 쌓인 경험을 통해 올라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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